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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는 커서 치아키선생님이랑 꼭 결혼할거야!"
치아키의 허리깨에 겨우 닿을 법한 작은 여자아이가 당돌하게 치아키에게 선언했다. 요즘 세상엔 자칫 잘못했다간 잡혀갈 법한 발언이었지만 소아과전문의인 치아키는 하루에도 열댓번씩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꼬마숙녀들의 고백과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던 지라 이제는 이런 말도 여유롭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인턴생활땐 눈치없이 'ㅇㅇ쨩은 선생님이랑 너무 나이차이가 많이나서 결혼하지 못할걸?'이라고 현실적인 제약을 일일히 들어가며 요령없이 아이들을 거절해 종종 환자들을 울렸던 치아키도, 이제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좋아. 그럼 그때까지 엄마 말씀 잘듣고 건강하게 지내야한다?"하곤 적당히 돌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정말 미나미랑 결혼해야해? 약속해! 새끼손가락!"
적극적인 아이네. 치아키는 빨리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걸라며 치아키를 재촉하는 여자아이의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아이의 바램대로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어주었다. 베시시 얼굴에 수줍게 미소를 띄우던 아이는 그럼 다음 주에 또 보자며 치아키와 간호사에게 인사를 남기고 씩씩하게 진료실을 나섰다.
역시 아이들은 귀엽다니깐. 손주를 배웅하는 할아버지마냥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뒤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던 치아키는 진료실 문 앞에서 때 이른 귀신 코프스레라도 하는 것 마냥 우중충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미도리와 마주쳤다. 미도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처럼 눈에는 왕방울만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타카미네?"
".....는데."
"응?"
"나랑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줄 알았는데!!"
병원복도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소리친 미도리는 치아키가 밉다는 듯 그대로 등을 돌려 무작정 제가 소속되어 있는 내과병동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타카미네 기다려라!"하고 곧바로 타카미네의 뒤를 따라 뛰는 치아키 때문에 복도엔 흰 의사가운을 입은 두 청년이 대낮에 병원복도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별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다른 직원들은 이 광경이 익숙한듯 "또 시작이네."하고 고개를 저으며 다들 담담히 제 할 일을 계속 할 뿐이었다.
사실 내과전문의 타카미네 미도리와 소아과전문의 모리사와 치아키는 병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커플이었다. 대학시절부터 같은 의과대 선후배 사이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학부시절부터 치아키만을 따라다녔던 미도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을 때, 주변인들은 '드디어 얘네가 사귀나보다'하고 후련해했으나 계속 보고 있으면 어딘지 없던 암도 걸릴 것 같은 둘의 연애패턴에 이제는 다들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쯧쯧. 저 염병할 것들은 또 뭐때매 저러누?"
이 병원의 의사들보다 이 병원 사정을 더 잘 안다는, 이 병원의 터줏대감 할머니가 미도리와 치아키의 뒷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환자 병 고치라고 의사시켜놨더니 다른 환자들 염장이나 지르고 있어. 저 염병할 것들.
"타카미네! 좀 나와봐라!"
치아키가 자재실 문을 두드리며 일단 좀 나와서 이야기하자고 미도리에게 호소했지만, 자재실 안에 들어가 문을 단단히 걸어잠군 미도리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별 대꾸도 하지 않고 콧물만 훌쩍일 뿐이었다. 이후로 치아키가 몇 번인가 더 미도리를 불렀지만 미도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조금 진정되자 큰 한숨과 함께 제 속마음을 입 밖으로 슬금슬금 내보내기 시작했다.
"....역시 저같은 건 그냥 불쌍해서 사귀어 주는 거죠? 사실은 선배도 여자가 좋은 거잖아요. 내가 선배를 좋아하니까, 선배는 동정해서 나랑 사귀어주는 거잖아요.. 선배는 거절같은 거 못하는 성격이니까... 그래도 몇년 후면 분명 나랑 헤어지자고 할 거야.. 사실은 여자랑 결혼하고 싶었다면서 분명 날 떠날거라고... 그럼 나는 선배한테 버림받고 분명 아무도 못 믿게 되겠지...분명 나는 혼자 쓸쓸하게 늙어 죽을거야.. 죽고 나서 몇주정도 지나야 겨우 옆집 사람한테 발견 될 거라구요.."
"저 타카미네. 어떻게 하면 생각이 거기까지 확장되는거냐?"
치아키가 어이없다는 듯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미도리는 지구종말론보다 더 암울한 제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예견을 지치지도 않고 입으로 줄줄히 읊어댔다. 타카미네는 의사말고 재난영화 시나리오작가가 됐어야 하는데. 치아키는 미도리가 이런 곳에서 엄청난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 번 시나리오작가가 되라고 슬쩍 권해볼까 싶었지만 그보다는 침울해있는 미도리를 먼저 달래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아서, 제 언니에게 눈사람을 만들자고 권했던 어느 얼음왕국의 공주마냥 똑똑 작게 문을 두드렸다.
"타카미네. 왜 그런 생각을 하는거냐. 나는 동정해서 너랑 사귀는 게 아니야. 고백도 내가 먼저 했던 거 잊었느냐?"
"그건 그렇지만.."
"이제 그만 나오거라. 점심 먹어야지. 같이 점심 먹자고 하려고 찾아왔던거지?"
"그건...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 말꼬리만 질질 늘어트리는 미도리에게 치아키는 이럴 때 쓰려고 아껴두었던 협상책을 넌지시 내밀었다.
"오늘은 햄버거라도 먹을까?"
"…해ㅇ밀 세트 말이에요?"
치아키가 던진 떡밥에 미도리가 슬슬 입질을 했다. 이번 달 부터 맥ㅇ날드에서 어린이버거 세트를 먹으면 지역캐릭터 열쇠고리를 준다는 포스터를 유심히 봤던 보람이 있었다. 치아키는 미도리를 더욱 확실히 낚아내기 위해 마지막 수를 던졌다.
"그래. 이번 달 유루캬라 열쇠고리가 증정되는 걸로 말이다. 나는 유루카라는 안 모으니까 내껀 네가 갖고 싶은 걸로 시켜라."
잠시 뒤, 성벽마냥 굳게 잠겨있던 자재실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고개를 빼꼼 내민 미도리는 치아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치아키에게 "정말 제가 원하는 거 시켜도 돼요?"하곤 되물었다. 진짜. 다섯살 아이같다니깐. 치아키는 제 병실을 찾는 아이들과 미도리를 대입해보다가 씨익 웃었다. 어느새 미도리는 자재실을 완전히 나와 치아키의 옆에 꼭 들러붙어섰다.
"얼른 갈까?"
"그게 그렇게도 좋으냐 타카미네."
햄버거는 몇 입 먹지도 않은 채 유루캬라 두개를 손에 들고 세상 행복한 듯 웃고 있는 미도리를 보며 치아키가 물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역시 치아키에 대한 것 말고는 매사에 별 흥미가 없어보이는 미도리가 레이싱카나 프라모델도 아닌 유루캬라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건, 처음엔 좀 의외였다. 어릴 적부터 습관처럼 모아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미도리의 집에 방문해보면 현관 발깔개부터 유루캬라 캐릭터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고, 조리기구며 칫솔 치약까지 그야말로 유루캬라가 아닌 것이 없었다.
유루캬라에 대한 미도리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던지 치아키는 종종 질투가 날 지경이었지만 뭐 그래도 미도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치아키라는 것을 치아키 본인도 잘 알고 있어서 딱히 유루캬라를 가지고 미도리와 싸워 본 적은 없었다. 다 큰 애인에게 이런 귀여운 취미가 있다는 것이 치아키 입장에선 마음 훈훈해지는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엄청 좋아요.. 이왕이면 다 갖고 싶었지만.. 햄버걸 다섯개나 먹을 순 없으니까.."
"다음에 또 가서 먹으면 되지. 다음에도 같이 가주마."
"역시 선배네요. 정말 좋아해요."
복작복작한 직원휴게실에서 저들만의 핑크빛 세계를 구축하고 앉아있는 미도리와 치아키를, 간호사들은 탁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그 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사귀는 거까진 좋은데 제발 솔로 마음에 염장 좀 지르지 말아주실래요? 간호사들은 일제히 한마음이 되어 뜨거운 시선으로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그 둘에겐 닿지 않았다.
어휴 내가 저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리를 피하고 말지. 적당히 서로 시선을 교환한 간호사들은 휴게실을 나가기 위해 일어서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미남의 존재에 다들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보자마자 모두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은 '잘생겼다'라는 네 단어. 미남이 많기로 소문난 유메노사키병원에서도 가히 최상위에 속할 정도로 잘생긴 사내였다.
어머 대체 누구야. 상상치도 못한 뉴페이스의 등장에 간호사들은 일순간 술렁였다. 안그래도 병원 최고미남인 미도리와 치아키가 서로 사귀기로 한 이후부터 암울해하고 있던 그녀들이지만, 또 다시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들어참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들 말고도 이 자리에서 뉴페이스를 반기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치아키였다.
"어? 텐쇼인 에이치!"
"오랜만이지? 모리사와군."
어머 둘이 무슨 사이래? 간호사들의 기대섞인 시선이 치아키에게로 몰려 들었다. 치아키에게 부탁해서 어떻게 다리를 좀 놓을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에 치아키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엔 일종의 존경마저 서려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노골적으로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너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국에 있는 의대로 갔다고 들었는데."
"뭐. 아버지 부탁도 있고해서 이제는 여기서 근무하게 되었어."
"아 맞다. 네 아버지가 여기 병원장이셨지? 너도 참 바쁘게 사네. 하하."
고등학교 시절에 친분이 있었던 듯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미도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유루캬라가 부숴질 정도로 세게 열쇠고리를 부여잡았다. 선배 주변인물은 어느정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야? 병원장 아들이라고? 하. 요새 드라마에도 안나오는 설정이겠다. 게다가 얼굴은 왜 저렇게 쓸데없이 잘생긴건데. 미도리는 털 세운 고양이마냥 잔뜩 에이치를 경계하며 치아키에게서 떨어지라는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역효과로 작용했는지 치아키와 오랜만에 이런저런 담소를 풀고있는 에이치는 점점 더 치아키 근처로 달라붙었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미도리의 눈은 이미 사람 대여섯은 죽일 듯 독기를 품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말할 용기는 없어서 지금 이 상황에선 에이치를 노려보는 것이 미도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언제 동창끼리 한 번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 하지 않겠어?"
쓰윽. 에이치의 손이 무방비하게 있던 치아키의 허리를 살짝 감쌌다. 그런데에 워낙 무감각한 치아키야 에이치가 제 허리에 손을 두르던 말던 인식도 못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면을 눈에 담고있던 미도리는 그야말로 속터져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니가 뭔데 선배 허리에 손을 올려! 얼른 안 떼? 그 손모가지를 잘라놔야 정신차리지!
미도리 내면에 잠재된 분노가 부글부글 들끓어 폭발하려고 하는 사이, 마치 처음부터 미도리의 질투를 이끌어내기 위해 계획했던 것 마냥 에이치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리며 미도리와 시선을 마주치곤 한 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당겨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 미도리에게 비웃음을 날려준 에이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다시 치아키와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저....저 자식. 분명 일부러 저러는 거야! 분명 선배를 노리고 있는 거라고! 미도리는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타카미네 미도리. 그동안 남들 다 하는 사랑싸움없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연애 일 년차만에 초특급으로 거대한 장애물을 눈 앞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 미도챠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달달한 일상물은 오랜만에 써보는 거 같네요^ㅇ^
그동안은 너무 암울한 분위기의 미도치아만 썼기때문에 이런 분위기도 한번 써보고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멘탈약한 얀데레공 너무 좋아하는데요, 이번 글에선 그런 미도리를 써보고 싶습니다 ^ㅇ^,,,게임에선 치아키라면 질색을 하는 미도리지만,,, 이건 2차창작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ㅅ' 개인적으로 삼각관계물은 별로 안좋아해서 잘 안쓰는데, 이런 구도도 재밌겠다 싶어서 써봅니다 사실은 삼각관계물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요 ^ㅇ^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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